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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 입학식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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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 여러분 입학을 축하합니다. 보호자 여러분들께도 진심으로 축하 말씀 드립니다.

여러분이 입학하는 올해, 호세이대학 이치가야 캠퍼스에 ‘오우치야마 교사’라는 새로운 교사를 개관합니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오래된 교사는 1955년과 1958년에 완공됐기 때문에 ‘55・58년관’이라고 불렸습니다. 저는 49년 전에 호세이대학에 입학하여 이 교사에서 공부했습니다.

호세이대학에 입학했을 때 저는 매우 기뻐서 대학 생활을 기대했습니다. 중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고 그리고 생각하고 싶은 것에 대해 끝까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호세이대학은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대학이었습니다. 지금 학생들은 독서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정말로 그럴까요? 여러분 각각에게는 읽고 싶고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읽고 싶은 것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학이라는 곳이 갖고 있는 ‘자유’입니다. 아모쪼록 지금밖에 없는 자유를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호세이대학 대학원에서 에도문학과 에도문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했습니다만 대학 입학 당시에는 아직 에도문학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1학년 때에는 좌우간 의문이 생기면 읽고,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읽고 하는 것이 매일의 생활이었습니다. 돈이 없다면 도서관이 있습니다. 헌책방 거리에 가면 싸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펼치면 그곳에는 반드시 새로운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적도 방향도 없이 책을 읽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 독서의 방향을 잡아주었던 것은 호세이대학의 수업과 교수님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1학년 때에 이수한 수업 중 하나가 ‘언어학’이었습니다. 매우 이상한 수업이었는데 교실에 가면 학점을 따려는 1학년들뿐만 아니라 이미 학점을 이수한 2학년도 3학년 학생들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그 상급생들이 강의를 하고 밑의 학년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여름방학에는 언어조사를 했습니다만 그 때에는 상급생들의 지도가 필수였습니다. 교수님과 상급생들의 대화에 나오는 것이 소쉬르, 야콥슨, 롤랑 바르트, 노암 촘스키와 같은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들뿐이었습니다. 알고 있던 것은 고교시절에 읽은 적이 있는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알고 있는 인류학에는 이 수업에서 다루고 있는 언어학의 방법과 교양과목에서 배우는 수학의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학문의 분야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학의 방법은 문학을 배우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저는 그 때부터 노암 촘스키의 ‘문법의 구조’라는 책을 들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왜 들고 다녔냐 하면 한 줄 한 줄 되풀이하여 읽지 않으면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어려워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책이라도 이해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면 교수님이나 상급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책을 동시에 읽음으로 인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후에 저는 3학년 때에 원했던 세미나(제미)에 들어가서 그 세미나에서 발표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에도문학과 충격적인 만남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미나는 근대문학 세미나였기 때문에 어떤 소설가를 다루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돈을 빌려 헌책방에서 전집을 사왔습니다. 그 전집 가운데 아주 짧은 에세이가 저의 미래를 바꾼 것입니다. 에도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충격을 받아, 그 핵심에 있는 구조를 ‘알게 된’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도 에도문화를 ‘이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연표를 ‘암기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저는 제 자신이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를 지식으로 추후에 채워가는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270년간의 문학과 문화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원에서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책을 읽고 그 세계에 빠져들어 자신의 시각이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생이 바뀌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체험일 때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다른 세계를 체감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곳으로 이끌어 주는 계기는 대부분의 경우, 대학의 교수님 및 수업, 세미나와 친구들입니다.

 ‘스스로 정하고 싶었다. 호세이라서 그것이 가능했다’- 이 말은 스포츠 해설자이자 회사경영자인 다메스에 다이(為末大)씨가 한 말입니다. 다메스에씨는 호세이대학 재학 중에 육상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했습니다. 다메스에씨는 대학을 선택할 때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감독 및 코치의 조언을 받으면서 연습내용을 자신이 결정하는 방법을 취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호세이대학만이 그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스스로 정하고 싶었다. 호세이라서 그것이 가능했다’라는 말은 제 자신의 말이기도 합니다. 수업 및 세미나는 독서, 연구, 깨달음의 나침반이고 교수님들은 감독이나 코치입니다. 어떤 것이든 실현하는 것은 여러분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인생 백세시대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대학졸업 후, 약 80년이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그 동안에 지금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다양한 일자리에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의 시대를 유연하게 살아가기 위한 기초가 독서입니다. 무엇이든 읽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기초능력을 만드는 최적의 시기는 대학생일 때입니다. 세미나 및 강의, 시험 등 읽어서 익숙해질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반드시 독서의 기초능력을 쌓아 주시기 바랍니다.
책은 이제는 종이 책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책은 무거워서 들 수 없다’든가 ‘놓을 곳이 없다’ 등과 같은 변명이 통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저도 계속해서 책을 디지털화하여 이미 2천권 이상, IPAD하나만 들고 있으면 어디에서든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수가 계속해서 늘고 있습니다. 정보량을 고려하면 책만큼 저렴한 것은 없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는 독서에 기초한 말하는 능력, 토론하는 능력도 필수입니다. 1시간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준비가 필요할까요? 그렇다면30초를 발언하기 위해서는 어떨까요? 사실은 똑같습니다. 1시간을 말하는 데는 설득하기 위한 자료를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책임을 지고 30초 동안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데는 불필요한 말은 빼고, 정말로 해야 할 말만 추려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실패가 허용됩니다. 충분한 준비를 하고 사람들 앞에서 발언할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발언에 대해 다른 학생 및 교수님들이 의문이나 비판을 제기할 때 그것에 대해 단어를 선택해서 반론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는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가치관이 만들어지고, 말하기 위한 논리력을 갖추게 됩니다. 관심이 없었던 문제도 발언을 하게 되면 데이터나 다양한 자료를 찾게 되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되면 시야가 현격하게 넓어집니다. 

실은 지금 말씀드린 친구들과 교수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그 내용을 활용해 논의를 하는 방법은 에도시대의 번교(藩校·번의 공립학교) 나 사숙(私塾)에서 했던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에도시대이기 때문에 교육 내용은 ‘논어’ 등으로 대표되는 유학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토론 능력을 키웠다는 점입니다. 호세이대학은 메이지 13년, 서기로 1880년에 ‘도쿄법학사’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 ‘도쿄법학사’를 만든 젊은이들 중에 에도시대에 태어나 지금의 오이타현에 있던 기쓰키번(藩)의 번교와 사숙에서 배운 두 명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 중 1명, 28세 가나마루 마가네(金丸鉄)는 일본 최초의 법률전문잡지를 간행한 인물입니다. 번교에서 프랑스어도 배웠습니다. 25세였던 이토 오사무(伊藤修)는 번교와 사숙에서 공부한 이후 기쓰키번 최초의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때는 아직 국회가 개설되지 않아 헌법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당시 일본에는 2000개 이상의 결사 단체가 있었다고 합니다. 국회 개설과 헌법 제정을 목표로 논의를 하기 위한 결사 단체입니다. 에도시대가 끝나 정치 및 법률을 맡아 왔던 무사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농민, 상인, 그리고 예전의 무사들이 격의 없이 토론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분’이라는 것을 갖지 않게 된 시민들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독서회를 열고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여 연설회를 개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미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그 기본이 된 것이 가나마루 마가네 및 이토 오사무 등 에도시대에 교육을 받은20대들의 토론의 힘이었습니다.

그 후 1881년에는 또 한 사람의 본교 설립자인 24세였던 삿타 마사쿠니(薩埵正邦)가 당시 정부의 방침에 따라 ‘도쿄법학교’를 세웠습니다. 이치가야 캠퍼스의 ‘소토보리 교사’의 가장 높은 층에 ‘삿타 홀’이라는 다목적 홀이 있습니다. 그 명칭은 삿타 마사쿠니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같은 이치가야 캠퍼스 안에 27층의 고층 교사가 있습니다. 그 이름을 ‘보아소나드 타워’라고 부릅니다. 프랑스인 보아소나드 박사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삿타 마사쿠니가 법학에 대해 배운 것이 이 보아소나드 박사의 학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인이 갖춘 스스로 생각하여 토론하는 힘과 유럽의 법률 지식이 만나 호세이대학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정신을 현대 사회에 뿌리내려 표현하는 ‘자유롭게 살아 갈 실천적 지혜’라고 하는 대학헌장을 기치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들 스스로의 ‘자유’를 사용하여 교수님 및 친구들과 토론하는 날들이 시작됩니다. 토론을 위한 말들을 동서고금의 모든 서적들로부터 획득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앞에는 시공을 초월한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것을 자신을 위해 쓰는 기회를, 아무쪼록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입학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