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이대학의 역사

건학의 정신으로 보는 호세이대학의 역사

호세이대학의 역사는 1880년(메이지13년), 재야의 법률가 가네마루 데쓰, 이토 오사무, 삿타 마사쿠니들이 도쿄 스루가다이키타 고가초 19번지에 도쿄법학사를 설립했을 때로부터 시작됩니다. 1880년은 일본근대법전의 선구인 형법과 치죄법이 공포된 해이며, 도쿄법학사의 탄생은, 자유민권운동이 고양되고, 근대법제도의 정비가 개시되어 있었던 당시 일본의 새 기운에 호응한 것이었습니다.
도쿄법학사는 설립 당초부터, 법률을 강의하는 「강법국(講法局)」 뿐만 아니라, 변호 실무훈련을 하는 「대언국(代言局)」을 가지고 있어, 「학교」가 아니라 법기술자양성의 「학사(学社)」로서, 개인의 「자유」와 독립, 그리고 국가사회의 「진보」등과 같은 것도 실무훈련을 통해서 지극히 구체적으로 고려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계승되고 있는 실무교육, 즉 캐리어 교육의 정신도 이와 같이 본교 건학 초창기부터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와 진보」의 건학정신은, 거슬러 올라 가면 프랑스법의 정신에 이릅니다. 삿타 씨를 비롯해서 도쿄법학사의 설립에 관련되었던 대부분인 사람들은, 당시 프랑스로부터 초빙되어 정부의 법률고문을 맡고 있었던 파리대학 교수 보아소나드의 문하생이었습니다. 보아소나드는 자연법 사상을 일본에 소개하고, 민법•형법•치죄법을 기초(起草)하는 동시에, 많은 법률가를 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81년(메이지14년)에 사립 대언사(代言社)가 금지되어 도쿄법학사는 「대언국」을 폐쇄하였고, 「강법국」을 독립시켜 도쿄법학교라고 자칭하게 되었고, 1883년(메이지16년)에는 그 교감으로 보아소나드가 취임했습니다. 또한 1889년(메이지22년)에는, 1886년(메이지19년)에 불란서학회에 의해 설립되어 있었던 도쿄불학교와 합병하여, 화불(和佛)법률학교로 개칭, 그 교장으로는 프랑스 민법전의 번역자이며, 「권리」, 「의무」, 「민권」과 같은 번역어를 만든 미쓰쿠리 린쇼(箕作麟祥)가 취임했습니다.
1899년(메이지32년) 우메 켄지로(梅謙次郎)가 교장이 되자, 졸업생 등을 대상으로 하는 리커런트 교육을 위한 「고등과」나 영국•독일•프랑스 어학 교육을 위한 「수의과(随意科)」를 개설했을 뿐만 아니라, 직장을 가진 교외생이 학교가 발행한 교과서로 독학하는 「강습생」제도, 또한 「청강생」제도나 「우대생」제도를 도입하는 등, 일반사회를 널리 내다본 교육 다변화의 개혁을 해 나갔습니다. 개혁은 성과를 내었고, 그 기초 위에 1903년(메이지36년)에는 전문학교령에 기초하는 재단법인 화불(和佛)법률학교 호세이대학으로 개칭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새로운 학교는 주간 수업의 예과와 야간 수업의 대학부•전문부, 거기에 대학원에 해당되는 고등연구과를 구비하였고, 초대 총리(총장)에는 우메 켄지로(梅謙次郎)가 취임했습니다.
우메 켄지로의 창의에서 나온 이러한 「열린 교육」을 이념•목적으로 하는 교학개혁의 정신 또한 오늘날 여전히 본교가 의거하는 것입니다.

본교의 교육에 다대한 공적을 남긴 보아소나드 박사의 흉상. 현재는 보아소나드•타워26층 스카이 홀에 설치되어 있다.

그 후 1918년(다이쇼7년)에 대학령이 발포되어 사립대학의 설치가 인가되었고, 이에 따라 1920년(다이쇼9년)에는 재단법인 호세이대학이 발족합니다. 오늘의 명칭과 형태를 가진 호세이대학의 탄생입니다. 당초 설치된 것은 법학부와 경제학부이며, 여기에 예과와 전문부가 더해지는 구성이었습니다. 1921년(다이쇼10년)에는 고지마치구 후지미초 4초매(麹町区富士見町4丁目)(현재지)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고, 1922년(다이쇼11년)에는 법학부에 문학과와 철학과가 더해진 법문학부가 탄생합니다. 그 동안에, 교원조직이 출강 강사체제에서 전임 교원체제로 이행, 수업 형태가 법률학교 시절부터의 야간 중심에서 주간 중심으로 변해 가며, 호세이대학은 종합 대학으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습니다.
현재는 16학부, 통신교육부, 대학원 14연구과•1인스티튜트, 전문직대학원 2연구과를 가진 종합대학이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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